<전윤호 시인의 세상 읽기> - 염치 있게 좀 삽시다
봄에 눈이 옵니다.
봄에 눈이 올 수도 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우리 고향엔 눈이 10㎝나 쌓였다고 합니다.
비에 비해 눈은 도시에서 천대를 받습니다.
교통체증을 유발하고 올 때는 좋지만 내린 뒤 지저분해진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하지만 눈이 지저분해지는 것은 눈의 잘못이 아니라 이 도시의 불결함 때문입니다.
그걸 보고 기분이 언짢은 것도 자신이 사는 곳의 지저분함을 보기 때문입니다.
세차를 한 지 며칠 안 되었는데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차가 온통 흙투성이였습니다.
내가 잠든 사이에 내 차는 진흙탕 길을 달리기라도 한 것 같습니다.
중국의 황사 때문이라고 합니다.
중국 북부의 헐벗은 사막에서 먼지가 바람을 타고 오는 거라고 합니다.
자세한 것은 분석을 해봐야겠지만 그 먼지가 꼭 중국에서만 온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제 차가 피해를 입은 방향을 보면 이상하게도 지붕이 아니라 밑에서 위로 뿌려진 듯 합니다.
그런데 맹세코 저는 최근에 진흙탕에서 차를 운행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다닌 곳은 다 서울이라는 도시 안이었습니다.
언뜻 생각해봐도 광화문과 여의도 정도가 출퇴근길을 벗어난 코스입니다.
아무래도 이 도시 안에 우리가 모르는 사막이 있는 모양입니다.
사막이 아니면 진흙탕이 있는 모양입니다.
영국이 부럽습니다.
왕위계승권 3위의 왕자가 자진해서 아프가니스탄에 참전했더군요. 그런데 그 집안은 원래 나라가 전쟁을 하면 참전하는 전통이 있다고 합니다.
언론에 노출되어 조기 귀국하는 왕자를 마중하러 아버지와 형이 함께 나온 모습이 당당해보입니다.
저 정도면 케케묵은 구시대의 산물인 왕이라 해도 존경할 만하겠지요.
요즘 우리나라는 고위 공직자를 하겠다는 사람들을 상대로 청문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아버지와 아들 둘 다 제대로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 드뭅니다.
다 아파트들도 있고 땅도 있고 골프장 회원권도 있고 예금도 많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범생들인데
하나같이 유전자가 부실해 현역 판정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왕 고위 공직자를 뽑으려면 건강 진단을 철저하게 해서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들을 시키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번에 나온 장관들의 면면을 보건데 앞으로 몇 년 간은 절대 집값이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피스텔 값도 오를 것이고 땅값도 오를 것입니다.
골프장 회원권도 오를 것이고 1가구 2주택 중과세도 없어질 것입니다.
어쩌면 부동산 투기라는 말 자체가 사문화될지도 모릅니다.
옛날 로마에서는 원로원 의원들이 모두 귀족이어서 평민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호민관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우리도 이제 호민관 제도를 도입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볼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인터넷에 기사가 뜨면 댓글이 달립니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관용구처럼 쓰이는 말이 있습니다.
‘뭐 어떻게 하든지 경제만 살리면 되겠지요.’ 그런데 그 경제란 놈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한 번 따져봐야 합니다.
철 따라 아파트를 옮기고 사무실용 오피스텔을 가지고 있으며 건강을 위해 골프를 치러 다니는 분들을 위한 태평성대가 오는 건 아닌지요.
봄에 눈이 옵니다.
봄에 눈이 올 수도 있습니다.
요즘 오는 눈은 와봤자 금방 녹아서 사라집니다.
봄눈처럼 오자마자 사라지는 것들은 쓸쓸합니다.
아무도 기억하지도 않고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봄눈이 옵니다.
눈이 오건 비가 오건 어차피 시간은 흘러갑니다.
우리는 어쩌면 봄눈처럼 잠시 이 세상에 왔다가 사라지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부자건 서민이건, 투기꾼이건 피해자건, 장관이건 말단이건 하늘에서 땅에 떨어지는 순간까지가 전부입니다.
그러니 좀 염치 있게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