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보내는 마음'에 해당되는 글 175건
day 105
너에게 보내는 마음/따스한 치유


“You and your sons are not to drink wine or other fermented drink whenever you go into the tent of meeting, or you will die. This is a lasting ordinance for the generations to come, so that you can distinguish between the holy and the common, between the unclean and the clean, and so you can teach the Israelites all the decrees the Lord has given them through Moses.” Leviticus 10:9-11 NIV


아론의 아들 두 명이 자기 마음대로 제사를 드리고 말았다. (10:1)

아론은 아들들에게 얘기를 안해준건가 뭐지? 


그래서 하나님은 9-11절에 친히 다시 말해주신다. 

영원히 지킬 규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는 것. 

익숙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 좁은 길로 가는 것이라도. 

그리고 그 방법을 알리는 것. 



사랑의 증거
너에게 보내는 마음/자기앞의 생

< 사랑한다면 예수님처럼> 3과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에서 


쉽게 성을 내는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더 큰 사랑이다. 

우리의 삶을 용납해주신 구세주, 우리의 분노를 사랑으로 바꾸실 수 있는 예수님의 사랑의 예표: 오병이어 사건. 

예수님도 제자들만큼이나 피곤하고 배고프셨을 것이다. 

그러나 군중을 그냥 보내지 않으시고, 머물고자 할 때 성내지도 않으시고, 계속 축복하셨다. 

"예수께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막 6:34)"


예수님은 잠깐 쉬는 것보다 그들의 필요를 더 중요하게 여기셨다. 

나의 문제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선택하는 것,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내가 갖고 있는 문제 때문에 섬김을 제한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섬김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기회로 이어지는 경우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이기적인 욕심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소명,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으로 결정해야 한다. 


마더 테레사의 삶: 

"왜 저에게 이런 친절을 베푸시나요?"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도움이 절실한 이웃을 멀리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바라보고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셨다. 

하나님께서 필요를 채워주시리라 믿는 것, 이것이 사랑이다. 

***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신뢰할 때 이웃을 섬길 수 있는 사랑의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오병이어의 교훈


우리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고, 우리에게 없는 것을 달라 하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난다. 

그러나 사랑이란 우리 손에 있는 것을 가지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의 삶이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연결고리
너에게 보내는 마음/따스한 치유

복음과 사명자행전의 연결고리 - 기억할 17가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9:16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고린도전서 9:23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고린도전서 9:14


요한복음 21장: 

갈릴리(고리)란 의미, 평소 우리의 삶의 현장. 이곳이 땅끝의 출발점인 동시에 목적지. 


1. 사명자는 자기 삶의 현장이 욕망의 바다임을 자각해야 한다. 

디베랴 호수 = "황제의 바다" 라는 뜻 (로마 황제 이름을 붙인 이름)


2. 사명자는 자신이 누군가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누군가를 왜 따라가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사명자는 언제 어디에서나 진리를 좇으며, 누군가를 진리의 물가로 인도하는 사람)


3. 사명자는 현재형으로 임해 계시는 주님에 대해 꺠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성숙은 언제나 현재형으로 자신과 함께하고 계시는 주님에 대해 깨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영성은 언제나 내 삶의 현장에서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에 대한 통찰력, 그 주님에 대한 깨어 있음이다.)

다윗 시편 23:4


4. 사명자는 주님 앞에서 낮고 낮은 어린아이의 마음이어야 한다. 

(언제나 주님만 의지하여 / 고후 12:9-10/ 

어린아이처럼 불완전한 자신의 결함과 약함을 잊지 않는 한, 

자신의 삶 속에서 현재형으로 임해 계시는 주님만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5. 사명자는 그물이 찢어지면 안 된다

(주님 안에서는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 / 사 43:19-21)

제자들이 잡아 올린 물고기

연결고리  (익뒤스는 이에수스-예수, 크리스토스-그리스도, 테오스-하나님, 휘오스-아들, 소테르-구원자)로 이루어짐. 

곧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시다 라는 신약성경의 핵심).   

인간의 야망이 아니라 예수님만 굳게 붙잡고 살아감으로 세월을 아끼고 세월을 건져 올리는 길.  

예수님 안에서는 어떤 그물도 찢어지지 않아요. 


6. 사명자는 예의의 사람이어야 한다. 

예의를 갖추고 세족식을 후에 말씀 전하신 하나님처럼. 

하나님께서 하찮은 우리에게 먼저 예의를 다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과 예의를 갖추는 것.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우리 자신은 죽고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만 드러나시게 하는 것. 

사명에 동분서주하느라 예배를 소홀히 할 수 밖에 없다면, 

그대는 그대 자신을 위한 자기 사명자일 뿐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사명자는 아님.


7. 사명자의 사명감은 배신감을 압도해야 한다. 

(잠에 곯아떨어진 제자들에 대한 이해심과 배려심이 크셨던 예수님. 

연약함, 무지함, 어리석음 때문에 물고기 잡고 있던 제자들을 위한 조반을 준비하실망정 배신감에 압도당하지 않으셨다. 

주님의 사랑과 사명감이 그 상황을 압도하고 초월했다. 모세도.)


8. 사명자는 주님의 은혜를 날마다 헤아려야 한다. 

물고기 153마리 함께 세기. 

모세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 공개적으로 헤아리기), 여호수아(정복한 왕들 세어보기), 찬송가 429장.


9. 사명자의 모든 질문은 주님 안에서 해소된다. 

제자들이 주님을 직접 뵙는 순간 그들의 마음속에서 제기되었던 숱한 질문들이 모두 사라져 버림. 

사람은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에 담기고, 또 마음에 담긴 것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의 시선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을 때에만 우리는 그리스도인" C.S. Lewis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시키기 위해 말씀 묵상과 기도생활이 필요. 


10. 사명자는 물질 이전에 마음을 주어야 한다. 

진주성찬보다 억지로가 아닌 진정으로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느냐의 차이.

더러운 걸인의 손을 잡아준 베드로 (사도행전 3:6-7)


11. 사명자의 믿음의 토대는 부활신앙이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믿음의 토대가 될 때에만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사명자로 살아갈 수 있다. 


12. 사명자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요21:15 상반절 요한의 아들 시몬 (베드로의 옛 이름)으로 부르신 것은 

지난 시절 어부였던 시몬으로 되돌아가 밤새도록 헛그물질만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지금 주님 안에서 새사람의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옛사람의 삶으로 회귀해 버렸는지 스스로 확인케 해주시기 위함이었다. 

*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최선이지, 모든 사람 가운데 최고가 아니라는 말이다.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너를 사로잡고 있는 네 욕망보다 (네가 빵과 생선, 다시 말해 육체의 양식을 목적으로 삼는 네 배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내가 지금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자문하고, 정직하게 자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옛 삶에서 탈피하여 주님만을 사랑하는 사명자의 삶을 일구어 갈 수 있다. 


13. 사명자는 모든 방향으로 사랑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 에로스, 스트로게(가족 간), 필리아 (친구, 우정, 형제애) - 모두 조건적, 기브 앤 테이크 식의 사랑

* 아가파오 - 무조건적 사랑

* 주님께서는 필리아의 사랑까지만 알고 있는 베드로의 수준에 당신을 맞추어 고백을 받아 주심

사랑은 상대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남편이 잘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고 격려해야 남편은 떳떳하고도 바른 가장이 될 수 있다. 

요구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면 결국 상처 받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그러나 요구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항상 감사하다. 

* 사랑의 위대함. 상대의 수준으로 내려가 상대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상대를 품는다는 말. 

그것은 상대의 주순에서 상대와 내가 함께 그대로 머문다는 말이 아니다. 

상대를 품으면 상대를 품은 나의 품 안에서 상대가 나에게 동화된다. 


욕망의 논리가 판을 치는 이 욕망의 세상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길은 '주님의 양', 즉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이외에 주님을 사랑하는 길은 없다. 

우리 각자가 무슨 직업을 갖고 있든, 그 궁극적 목적이 사람이 사랑하기 위함일 때 

우리는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명자 일 수 있다. 


* 아르니온 (어린 양) -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처지에서는 것이다.

* 프로바톤 (장성한 양) - 자기보다 더 크고 나은 사람. 자기보다 더 크고 나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수고를 인정해 주고, 또 그를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 프로바티온 (새끼 양과 장성한 양의 중간) - 자기와 같은 수준의 사람을 사랑하는 것. 경쟁 상대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해 주며 더욱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아들로 외양간의 가장 비천한 사람보다 더 낮은 사람으로 오신 주님. 

가장 낮은 사람에서부터 가장 높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의 주님. 

그 주님의 제자라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주님의 양들을 위해 

모든 방향으로 그 사랑의 통로로 살아야 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14. 사명자는 주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살아야 한다. 

두 팔을 벌리는 것은 항복하는 것. 더 이상 저항하지 않겠다는 표시. 온전히 주님에 의해 다루어지는 것. 


15. 사명자는 소문과 진실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물고기 잡으러 가버린 제자들. 영원한 진리를 말하기는 하면서도 

자신을 스스로 갉아먹는 자기 욕망에 마음과 시간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리는 것? 

욕망의 자리에서 자멸의 길을 걷던 인간을 영원한 은혜의 자리로 데려가시는 것이 주님의 은혜라면, 

그 다음부터 주님의 그 은혜를 의지하여 주님을 따르는 것은 인간의 의지다.

당신의 택하신 자녀를 은혜의 자리로 데려가시는 것이 주님의 책임이라면, 

그 은혜의 주님을 의지를 다해 좇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이다. 

'너는 나를 따르라' (두 번 반복) 

베드로의 권면 (벧후 1:2-11) 힘써 주님을 따르는 사람만 거짓 소문의 통로가 아니라, 

오히려 거짓되고 헛된 소문으로부터 형제자매를 보호하고 감싸 주는 사명자로 살 수 있다. 


16. 사명자는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때와 시기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권한에 속하므로 우리가 알 바가 아님. 

- 성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일이었기에, 성부 하나님의 영역을 절대적으로 존중하신 것. 

믿음은 피조물의 머리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그 영역을 존중하는 것.

성부 하나님께 어떤 이의도 제기지 않는 완전한 순종으로, 

죄와 사망의 덫에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는 그리스도의 사명을 완수하실 수 있었음. 

믿음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존중하는 것. 그런 믿음을 지닌 사람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드리는 사명자행전을 일구어 갈 수 있다. 


17. 사명자는 지금 주어진 삶의 자리를 인내로 지킨다. 

내가 지금 구하는 것이 나의 영광인가, 하나님의 영광인가?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이 나의 뜻인가, 하나님의 뜻인가?

요한이 잊고 있었던 주님의 말씀 (요 14:26 에만 있는 성령님에 대한 말씀)을 다시 생각해 낼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의 역사. 

다른 제자들이 잊어버린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 낼 수 있었던 것은 

노파 마리아를 봉양하는 삶의 자리를 지킨 요한을 위한 성령님의 역사. 

요한만 기록한 말씀들: 

성령님 (요 14) /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 8) -  영원한 생명의 빛이 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 / 

세족식 이야기 (요 13) - 노파 마리아의 발을 씻어 드리는 요한의 일상사가,  

자신의 발을 손수 씻겨 주시던 주님의 따뜻한 손길을 잊지 않게 해줌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 -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서로 사랑하라'

작은 사람도 큰 사람을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도 부자를 사랑하며, 병든 사람도 건강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명자는 자기에게 현재 주어진 삶의 자리가 곧 사명의 자리임을 깨닫고 인내로 지키는 사람.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가 바로 땅끝의 시발점임을 알기 때문.



비전을 아로새긴 자
너에게 보내는 마음/따스한 치유
주여 옳소이다
너에게 보내는 마음/따스한 치유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And Jesus said to her, 
“Let the children be fed first, for it is not right to take the children’s bread and throw it to the dogs.” 

But she answered him, 
“Yes, Lord; yet even the dogs under the table eat the children’s crumbs.”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나아간 이방 여인

유대인이 먹는 떡을 이방인에게 줄 수 없다고 믿음으로 나아온 여인에게 반응하시는 예수님


사단은 유혹하고 하나님은 시험하신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 1:2-4)


사단은 무너뜨리지만 하나님은 이를 통해 복주시기 원하신다

두 가지 시험

1) 예수님을 진정 의지하는가 (생명의 주인이라고 인정하는가) 

- 예수님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며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었음

- 하지면 여인은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써 귀신을 쫓을 권세가 있음을 믿었고

- "주여 옳소이다마는" 이라고 말하며 권위를 존중하는 겸손함

- 개 취급하시는 예수님의 선언까지 인정

- 겸손한 믿음


2) 응답의 간절함이 있는가

- 개로 비유했을 때, 누가 상처 받지 않겠는가

- 거절당하는 것 같을 때, 누가 계속 나아갈 수 있겠는가

- 하지만 여인은 딸 아이를 살릴 수 있다면 자존심은 몇번이고 내려놓을 수 있었음

- 부스러기같은 은혜라도

- 내면에 굳게 박힌 겸손하면서도 절박한 믿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막 7:39

(마태복음에서는 네 믿음이 크도다)

* 예수님이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은 인종이 아니라 그녀의 믿음

*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를 나타내심

* 하나님 나라는 믿음을 통해 역사하는 나라

* 믿음으로 그 나라의 백성이 되고

* 간절한 믿음으로 역사를 이루는 나라

*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삶


이방 여인 처럼

전심으로, 간절함으로, 하나님만 의지하여 기도하게 하시고

기도를 통해 믿음이 자라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