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는 중간이 없다. 사랑은 단순히 방향일 뿐이며, 바라는 것을 붙잡고 나면 그 이상 바랄 수가 없다.
따라서 사랑은 충족이 되면 스스로 타 사라지고, 욕망의 대상을 소유하면 욕망은 꺼진다.
클로이와 나는 바로 그러한 마르크스적인 나선의 덫에 걸릴 위험이 있었다.
전화는 전화를 하지 않는 연인의 악마 같은 속에 들어가면 고문 도구가 된다.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정말 무서운 것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용납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워하면서 어쩌면 그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끝도 없이 이상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고등학교졸업하고 드보통씨가 쓴 책 다 읽기에 들어갔다. architecture of happiness까지 다 읽은 상태. 마지막으로 읽은게 status anxiety다. 철학,건축,여행,사랑 등 이렇게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쓰고 할 수 있는 언어도 많은 걸 봐서 드보통씨도 나처럼 좋아하는 게 딱 하나가 아니라 이것저것 다 건들어보는 타입인가보다. 물론 다른 건 드보통씨는 글을 잘쓴다는거.
그가 쓴 글 모두와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가끔은 읽다가 어머, 이거 어떻게 아는거지, 남자잖아. 여자가 아니잖아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는데 그의 책을 읽은 다른 이들도 그렇게 느낀 적이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열광하는 이분의 책은 뉴욕 서점에서는 잘 잊지도 않고 인기도 별로 없는 듯. 왜 한국인들이 그와 공감하고 그의 책을 사서 통하는 부분을 적어가면서까지 읽는 걸까.
어쩌면 미국인들은 정말 심각한 연인관계를 기피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연인관계가 아닌 dating이 정말 자유로운 사회이기도 하지만 그 만큼 누군가에게 commit한다는 것에 대해서 큰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한국인들에겐 생소한 open relationship이라는 것도 있는 것이겠고.
그는 말한다. 나라는 존재를 인식해주는 누군가가 있지 않다면 나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것은 다른 사람의 존재를 보면서 자아를 인식하게 된다는 루쏘의 생각과 비슷한 것 같다. 하지만 니체는 싫어할꺼야, 그렇게 누군가에 의존한다는 것. 그럼 그들의 사랑관은 어땠을까. 니체는 결혼을 하지 않은 걸 알고 있는데 루쏘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사랑이라는 건 tangible한 것이 아니라서 눈으로 확인하기 힘든 현상/마음상태/이걸 뭐라고 해야되는거지.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도 가능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