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엔 누구나 혓바닥을 시퍼렇게 만드는 사탕과 속이 쓰릴 정도로 매운 길거리표 떡볶이에 열광한다.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꼬맹이였던 지라 '잡곡밥에서 콩 골라내기'는 20년 넘는 세월 동안 터득한 필살의 기술이다. 왜 맛있는 것들은 죄다 몸에 안 좋은 걸까? 왜 몸에 좋은 것들은 맛이 없을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남자 역시 마찬가지. 알록달록 눈이 즐겁고 첫 맛이 강렬한 남자들은 십중팔구 '불량식품과' 에 속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벤트를 펼치고 대학교 강의실 앞에서 꽃 들고 기다리는 남자. 생전 받아보지 못한 공주 대접에 갸륵해하며 못 이기는 척 넘어갔지만 연인 사이의 모든 갈등이 비 오는 날 집 앞에서 무릎 꿇고 있으면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유치함에 두 손 두 발 다들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닭살 돋았다). 말 수 적은 남자가 멋있어 보이는 시기도 있었다. '내가 세상과 당신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어주리라' 라는 얄궂은 전투욕에 불타올랐지만 그런 사랑의 결말은 대개 두 가지다. 타인과 소통할 줄 모르는 나르시즘에 지쳐 나가 떨어지거나, 파고 파고 들어갔더니 정작 그 속에 아무 것도 든게 없어 허무해지거나. 외모만 번지르르한 남자는 대게 얼굴 값을 한다. 숱한 여성들을 울린 전력을 자랑스레 떠벌리는 그 얼굴에 '계집질 확정' 이라고 씌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만은 특별하겠지' 라는 생각으로 시작하는 연애, 딱 한 마디만 하겠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모든 책임을 상태 불량한 남자들 탓으로 돌리고 나면 꽤나 홀가분해진다. (나 역시 그들에게 나쁜 여자였다는 사실쯤은 가뿐히 제치고). 그리고 작은 희망을 품는다. 그들에게서 벗어나면 나에게도 '이토록 달콤한 순간' 이 찾아오겠지. 서로를 구속하려 들지도 않고, 모자란 사랑에 허덕이지도 않고, 질질 짜며 에너지 소진할 필요도 없는 궁극의 연애가, 인공 감미료의 찜찜한 뒷맛 따윈 깔끔하게 날려버리는 성숙한 어른의 연애가!
그리고 나서 나는 한 남자를 만났다. 그는 셀카를 찍어 미니홈피 메인화면에 올려놓지도, 혈액형별 성격을 게시판에 잔뜩 퍼오지도 않는 남자다. 정장 재킷 안에 후드 티셔츠를 입지도 않고, 면 음식을 먹을 때 후루룩 소리를 내지도 않는다. 내가 밥 값을 낸다고 해서 바르르 떨지 않고, 레스토랑에서 모르는 메뉴를 주문할 때도 주눅 들지 않는다. 오버 액션을 취하며 차 문을 열어주지 않는 반면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위해 나를 불편한 자리에 앉히지도 않는다. 자신의 지인들을 자연스레 나에게 소개시키며, 손을 잡을 때 헐렁하게 손에 힘을 빼는 내 버릇에 대해 잔소리를 늘어놓지 않는다. 무엇보다 관계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지나치게 소홀하지 않는다.
자, 그리하여 이제 나의 연애는 아무 문제 없이 흘러간다. '아무 일 없는 어느 연인의 하루' 란 타이틀의 영화를 한 편 찍어서 상영해도 될만큼 완벽하다 (그런데 그 영화는 과연 누가 볼까?). 하루에 열 두 번쯤 휴대폰을 보지도 않고, 상대의 일거수 일투족을 꿰고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거나 그에게 새로운 여자가 나타난다거나 하는 '사건' 도 없다. 이쯤에서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어야 할까?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내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디스트라는 것! 파닥파닥 뛰지 않는 연애에 결핍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사실은, 조금 지루하다. 게다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런건 연애가 아니지 않나? 이미 식어버린거 아냐?" 라는 친구의 말에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게 20대에 할 연애냐? 무슨 노친네들도 아니고" 라는 다른 친구의 말에도 크게 반발하지 않는다.
밍밍한 연애에 조미료를 쳐야 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 케이블에서 재방송하는 '연애시대' 를 다시 보게 됐다. 떠보고, 의심하고, 자존심 지키기에 전전긍긍하며 '사랑이 뭘까' 를 집요하게 묻던 그 드라마의 라스트 신을 기억하는가. 먼 길을 돌아 다시 만난 두 주인공은 한낮의 공원에서 나른한 피크닉을 즐긴다. 햇살은 통속적으로 빛나고, 카메라 앵글은 지루하게 빙빙 돈다. 그들은 크게 웃지도 않고, 마냥 달콤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 장면은 우리에게 행복은 졸린 일상에 가깝다고 말한다. 정작 행복한 순간에는 그 누구도 행복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행복의 꼭짓점, 궁극의 연애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손을 잡고, 눈을 맞추고, 연신 얼굴을 쓰다듬지 않아도 관계는 지속된다. 그저 작은 카페 구석에 처박혀서 하루 종일 각자 보고 싶은 책만 보다 헤어져도 섭섭하지 않은 형태의 연애도 있는 것이다. 이런 연애가 정신 건강에 좋을까, 나쁠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불량식품으로 삼시 세 끼를 때울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지루하던 어느 오후 문득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손을 보며 이 남자 손이 이렇게 생겼었지, 하고 생각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최근에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오일프리 샐러드도 거친 건강빵도 꼭꼭 씹어 잘 먹는다.
유기농 연애. 마리끌레르 7월호
글 : 김지선, 에디터: 이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