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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옳소이다
너에게 보내는 마음/따스한 치유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And Jesus said to her, 
“Let the children be fed first, for it is not right to take the children’s bread and throw it to the dogs.” 

But she answered him, 
“Yes, Lord; yet even the dogs under the table eat the children’s crumbs.”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나아간 이방 여인

유대인이 먹는 떡을 이방인에게 줄 수 없다고 믿음으로 나아온 여인에게 반응하시는 예수님


사단은 유혹하고 하나님은 시험하신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 1:2-4)


사단은 무너뜨리지만 하나님은 이를 통해 복주시기 원하신다

두 가지 시험

1) 예수님을 진정 의지하는가 (생명의 주인이라고 인정하는가) 

- 예수님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며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었음

- 하지면 여인은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써 귀신을 쫓을 권세가 있음을 믿었고

- "주여 옳소이다마는" 이라고 말하며 권위를 존중하는 겸손함

- 개 취급하시는 예수님의 선언까지 인정

- 겸손한 믿음


2) 응답의 간절함이 있는가

- 개로 비유했을 때, 누가 상처 받지 않겠는가

- 거절당하는 것 같을 때, 누가 계속 나아갈 수 있겠는가

- 하지만 여인은 딸 아이를 살릴 수 있다면 자존심은 몇번이고 내려놓을 수 있었음

- 부스러기같은 은혜라도

- 내면에 굳게 박힌 겸손하면서도 절박한 믿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막 7:39

(마태복음에서는 네 믿음이 크도다)

* 예수님이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은 인종이 아니라 그녀의 믿음

*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를 나타내심

* 하나님 나라는 믿음을 통해 역사하는 나라

* 믿음으로 그 나라의 백성이 되고

* 간절한 믿음으로 역사를 이루는 나라

*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삶


이방 여인 처럼

전심으로, 간절함으로, 하나님만 의지하여 기도하게 하시고

기도를 통해 믿음이 자라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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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실
너에게 보내는 마음/따스한 치유

갑자기 따뜻해진 날씨와 여러 통로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축복받은 월요일


유엔에서 이뤄지고 있는 여성주간 UN Women's Week 의 일환으로 위안부 관련 행사를 통역하지 않았다면 

영적으로 무딘 하루로 보낼 수도 있었을 것 같아서... 그런 기회 마련해준 yr이와 아버지께 감사ㅠㅠ


그 정도로 심각한 문제인지 모르고 있었고, 그렇게 전략적으로 일본이 등한시하고 증거를 깔아뭉개고 있는지 몰랐기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이 갈등을 주님의 능력으로 해결되길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게 되었다. 


싫은 것도 많지만 내실이 다져진 여러 분야에 대한 고민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일본에게 본받아야 할 점. 

위안부에 대해 처음 이슈화 한 것도 일본 NGO이고 우리는 변변한 연구소도 없는데 일본에는 여러개가 있다고 한다. 


논문 실적, 연구비 지원 등등에 신경쓰느라 내실있는 연구가 이뤄지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 각 사람이 주님 안에서 빛의 자녀로써의 자아를 회복하고 내실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사람들이 되기를 추구하는 한국 문화의 한 단편인 것이 아닐까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에베소서 1:2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요한1서 1:9-10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사야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1:2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로마서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에베소서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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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riend
너에게 보내는 마음/따스한 치유

어제 아침에 했던 묵상.


저는 예수님을 따라 살기 때문에 미움받고 있나요. 

아니면 예수님처럼 끝까지 사랑해서 핍박받는게 아니라 

제가 잘못살고 있어서 미움받는데 그렇게 치부해버리고 있나요. 


제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살지는 않았나요. 

아니면 어리석은 제가 예수님을 가리면서 살고 있나요. 

친구로 보내주신 성령님 가르치심대로

저도 주어진 자리에서 주님의 기쁨 그 자체이게 해주세요. 


“When the Friend I plan to send you from the Father comes

—the Spirit of Truth issuing from the Father—

he will confirm everything about me. 

You, too, from your side must give your confirming evidence, 

since you are in this with me from the start.” 


John 15:26-27 MSG


그리고 어제 저녁

오늘 하루종일

십자가를 생각했다. 


올해 읽고 있는 존 스토트 목사님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건 왠지.. 매년 읽어야 될 것 같은 주옥같은 책이다. 


(세상의 재난을 이해하는데 도우미 되는) 하나님의 사랑. 

요한일서 인용으로 시작되는 논의. 


첫 번째 구절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요일 3:16)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 어려움 없이 자기들이 생각하는 사랑을 우리에게 말하곤 한다.

그들은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랑을 구분하기 위하여 쓰인 책들.. 을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랑의 의미는 자명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요한은 그들과 의견을 달리한다. 

그는 감히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세상은 무엇이 참된 사랑인지를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물론 모든 사람은, 정도와 특성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랑을 체험한다. 

그러나 요한은 어떠한 숨은 동기에 의해서도 더렵허지지 않는 단 하나의 순수한 사랑의 행동이 

세계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자격이 없는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내주신 사랑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사랑의 정의를 찾고자 할 때

사전이 아니라 갈보리를 바라보아야 한다.


요한의 두 번째 구절은 더욱 분명하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hilasmos)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4:10). 

우리가 바로 앞에서 공부한 로마서 3장의 그 단락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의 확증으로서 십자가의 대속적 성격 (hilasterion)을 거론해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여기서 요한은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남으로 이야기한다.

이 둘은 결국 똑같은 것이다.

참된 사랑은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며,

또한 하나님은 그분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서 우리를 위하여 죽게 하시며, 

우리를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하심으로써 그 사랑을 보여 주신 것이다 (9절). 

"살리려 하심"(9절)과 "화목 제물"(10절)이라는 두 단어는 매우 핍절한 우리의 상태를 암시한다.

우리는 죄인이었으므로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 아래 죽어 마땅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셨는데, 그를 보내심으로써 하나님 자신이 오셔서

우리 대신 그 죽음을 죽으시고 그 진노를 담당하신다.

그것은 순전하고 정결하며 우리에게 과분한 사랑의 행위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한에게서 배우는 것은, 비록 이 세상에서는 우리의 관심이

악과 고통의 문제에 계속해서 집중되며 그러한 문제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그러한 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공개적이고도 가시적으로 드러난 십자가를 벗어나서

그런 문제들을 생각하지 않도록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십자가를 하나의 '비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다른 모든 비극에 빛을 비춰 주는 비극이다. 


바울도 또한 로마서 5장의 전반부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쓴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두 번 언급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사랑의 실재를 확신할 수 있는 

상보적인 두 가지 방법을 제공한다.

그 첫 번째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된다" (5절)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8절)는 것이다.

복음의 가장 만족스러운 측면 중의 하나는, 그것이 주관적 객관, 역사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

하나님의 아들의 일과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조합시키는 방식이다.

바울이 말하는 바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을 입증하셨기 때문이며

또한 그분이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하여 그 사랑을 계속해서 우리 마음속에 부어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바울이 하는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 위에서 객관적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

관심을 집중시킬 것이지만, 더 나아가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깨달음을 

우리 마음에 넘치게 하는 일을 통해 그 자신의 내적이며 인격적인 증거에 의하여

십자가의 사랑의 역사적 증거를 확증해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성령님에 대한 우리의 경험과 유사하다.

이 증거는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님이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님이 우리로 하여금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시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을 그렇게 부를 수 있게 될 때 우리가 

의롭게 되고, 화목되고, 구속되고,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기 때문이다. (롬 8:15-16)


[이 부분도 완전 좋음]


사랑의 선물의 가치는 그 선물을 주는 사람이 얼마만큼의 값을 지불해야 하며,

그것을 받는 사람이 어느 정도의 자격을 가지느냐에 의하여 평가된다.

예를 들면, 사랑에 빠진 젊은이는 연인에게 자신을 바치는 사랑의 상징으로 힘에 부치는

비싼 선물을 주려고 하는데, 이는 그의 생각에 그녀는 그것을 받을 만하며

그 이상이라도 받을 만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으므로 그녀를 위하여 칠 년을 봉사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주신 것은 원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주셨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증거다" (로마서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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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two
live love


3년전 이맘때쯤부터 작년 말까지 때로는 봄바람처럼 가끔은 동해바다의 파도처럼 마음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감사한 것은 나도 모르게 우상 삼았던 것을 하나씩 내려놓게 하셔서 


내일 주님을 만난다면, 말씀으로 함께 제 마음을 감찰했던 순간들에 의하면 예수님이 제일 좋다고

하지만 만약 제가 더 좋아하는게 있다면, 진짜 죄송하다고 얘기할 수 있는 마음이 되었다. 


학부때는 한국에서 본 적도 없는 차원의 부유한 친구들을 보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지만

말라위에서 계절마다 최선의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제일 좋은 것을 떼어드리는 어머니들

선하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양하는 어린이들을 보면서

뉴욕에서 서울에서 좋다고 여기는 것들의 부질없음을 깨달았고


분야마다 좋다고, 멋있다고 여겨지는 모습들이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함이 아니면

개인적인 차원에서 얼마나 영을 갉아먹는지,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덕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구는 

특별히 지속가능한 발전학에서는 정부도 주목해주지 않는 고아와 과부와 객

(so minority groups, migration, labor employment opportunities)에 대한, 

그들이 자연을 다스리며 살지 못하게 하는 것들 

(lack of natural resources, high financial & behavioral costs of renewable energy adoption, 

difficulty of mitigating air pollution due to its global nature)에 대해 신경쓰게 되었다.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연구, 거짓없는 연구, 데이타 조작 안하는 연구,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연구. 

교수는 선생님의 종류 중 하나일뿐 권세를 주장할 자리가 아님을. 

예수님이 보냄 받은 하나님보다 크지 않다고 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 어떤 위치에 있던 상관없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에 100% 순종하며 

낮은 마음으로, 더 좁은 문, 좁은 길을. 


사랑하는 엄마께서 박사 연구하고 있는 걸 알고 그랬는지

신생아때 울지 않아서 외할머니가 벙어리인 줄 알고 툭툭 쳐보셨다는 나.

맞벌이 하시느라 바쁜 부모님 신경쓰게 해드리지 않고 싶어서 반항 한번 없이 자란 큰딸은 

50세가 넘어서야 적극적으로 사랑표현을 하신 아빠때문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적극적으로 애정표현 해주는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에 만날때도 속마음은 별로 드러내지 않았던 같고, 

대학교때 더 솔직했던 것 같은데 그 때는 둘다 너무 어려서 어떻게 해결해야 할줄 몰랐고, 

함께 기도해볼 생각을 못했다. 

본이 되는 크리스쳔 커플도 주변에 없었고. 

결국 지난 3년간 여러 사람들이 다가와도 쉽게 마음을 내주지 않았던 것 같다. 


주변의 도움으로 하나씩 다 만지고 나니 동시 다발적으로 다가오는 분들이 있었는데

그래서 지난 한달간, 특별히 사흘간 또 하나씩 아버지와 마음에 걸리는 것들을 하나씩 풀고. 

사랑이 다른 형태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상대방인 나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차분히 잔잔히, 

그리고 본인의 마음이 앞서지 않도록 조용히 좋아할 수도 있다는 것. 

관계 마저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함 인데 

서로의 마음을 얻으려고 겉으로 잘해주고 표현하고 

항상 함께 있는 것이 사랑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아버지 보시기에 기뻐하지 않으실수도. 

그렇지만 나같이 둔한 애한테는... 말해주지 않으면 몰라요


아직도 참 모르는게 많은데 하나씩 가르쳐주시며 사랑을 알려주시고, 

그 은혜 누리고 나누게 해주심에 감사 또 감사!

Blessed to be a blessing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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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pleasure
live love/새로움의 나날

여러가지 생각이 둥둥 떠다녀서 차분히 정리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날 그날 이 구절이 얼마나 와닿느냐에 따라서 내가, 우리가 누리는 은혜는 차원이 다른 것 같다. 

스스로 세운 선과 악의 기준에 따라서 세상을 바라볼 때 느끼는 갑갑함과 

(왜냐면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나는 완전하지 않아서 시시때때로 그 기준도 바뀜으로)

그렇게 세운 기준대로 살지 못하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 느끼는 자괴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성취하고 싶은 어떤 기준에 도달하지 못할때 느끼는 허무함으로 인한 악순환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건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 비할 수 없는 어떤 선하고 완전한 기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게 아닐까


그래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 건지 잘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땡볕에 물 기르러 나온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너무나 웰커밍하고 따스하면서도 상콤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불안감을 겪는 분과 자살시도를 한 학부생을 만나고 난 뒤 집에 와서

오늘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 선후배들, 교수님들, 그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건, 당부하고 싶은 건

예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것, 꼭 주인으로 모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바램을 다시 한 번 고백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신기하리만큼 모든 것이 단순해진다. 


지금 내게 주어진 선택의 기로에서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내 영을 궁핍하게 할 것 같고, 악한 생각을 갖게 할 것 같은 건 더 이상 별로 하고 싶어지지 않는 것이다. 

억지로 거하게 취하는 술자리에 안 가고 싶고, 비싼 것으로 날 치장하지 않으려고 하고, 잔인한 영화를 의도적으로 안 보는 차원을 넘어서

그런 선택들이 내게 기쁨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선택 사항 중에 고려되지 않는 것. 


술에 취해야지만 친한 분들이라면, 다른 것에 의지해야지만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사이라는게 더 속상하고

나는 최소한으로 살고, 내게 주어진 것으로 다른 이들이 더욱 누리면서 살 수 있다면 감사하고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고, 성적으로 취하는 내용은 우리의 마음 상태에도 영향을 미치기에 미래를 더욱 소망하게 하는 내용을 보고 싶은 것.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어느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든지, 

하나님에게로 향하지 않으면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일이 자신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왜 불평합니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진 사람이 있습니까? 

나도 아니고 여러분도 아니며, 지구상에 그러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누구도, 제왕이나 교황마저도, 근심 걱정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바보스러운 병약자들은 말합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얼마나 행복해하며, 얼마나 부자이며, 

얼마나 위대하며, 얼마나 큰 권력을 갖고 있으며, 얼마나 의기양양합니까?"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선한 일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일들은 모두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을 것입니다. 

세상일들은 불확실하고 짐스러운 것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것을 충족하게 가지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절제가 우리의 필요를 충족해 주는 것으로 족합니다.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원할수록 인간의 결점인 부패를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더 분명히 볼 수 있기 때문에 현세의 삶은 우리에게는 더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내면이 깊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받는 육체의 욕구를 많이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행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며,

비참하고 썩어 죽어 가는 삶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화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삶에 너무나 강하게 얽매인 나머지 노동이나 걸식을 통해

일상적인 필요를 충족하지 못하면서도

세상적인 생활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에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모든 희망과 열망을 영원한 선을 구하는데.


이렇게 우리 인간은 매우 연약하고 변하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에 겸손해야 하며,

결코 자신을 높이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렇게 점점 명확해지는 것도 있지만, 아직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것도 많다. 


지금의 자리를 마무리하고 나아가야 하는 길은 어디일까. 

치열하게 바로 교수 시장으로 뛰어들어가야 하는 것일까?

연구직을 하면서 천천히 해도 되는 걸까? 

프리랜서로 연구하면서 충분히 더 생각하고 경험쌓으면서 하는것은?

부모님은 될 수 있는 한 빨리 한국에 오길 바라시는데, 나도 그런 마음이 들다가도 아직 더 있어보고 싶은 건 이곳에서 만나야 할 분들이 있어서인가 아니면 한국 사회에 갑갑함을 느껴서인가? 그런데 내가 지금 만나야 할 영혼이 한국에 있다면? 


교수라는 자리가 주는 안정성, 하지만 그만큼 바쁜 생활 (연구, 어드바이징, 수업 티칭) 가운데 충분히 제자삼으며 살 수 있을까? 

아직은 힘들겠다고 생각하는 건 내가 스스로 모세처럼 못하겠다고 하는 것일까? 

억지로 시키시는 분은 아니니 거리낌이 있을 때는 괜찮은걸까? 

"그렇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항상 거리낄 것 없는 양심을 간직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행 24:16

기도하다 보면 지금 내가 나아가서, 하나님과 이웃 사랑할 어디인지 더욱 확신을 주시리라 믿는다. 마치 연구하고 깨달은 것을 나눴을 때 내가 제일 기뻐한다는 것을 알고나서 생애 첫 대학 인터뷰가 잡힌 것처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for it is God who works in you, both to will and to work for his good pleasure 

빌립보서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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