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한 마디로 날 표현하면 어떤 단어냐고 친구들에게 물어봤던 적이 있는데 devoted, serene, illogical 등등이 나왔었다ㅎㅎㅎ 사실 내 마음은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번잡했는데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비너스가 그래서 놀랐었는데,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서 그럴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죽고,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달라고 구하니까. 내 힘으로는 평안하고, 착할 수 없지만, 성령님이 도와주시니까. 기도가 습관화되면서 조금씩 변해가고, 기도의 내용도 바뀌어지는 것을 느낀다.
time series 공부하다가 든 생각은 향이 좋은 차를 마셨을 때, 긴 겨울이 지나고 피기 시작한 예쁜 꽃을 봤을 때 생각나는 사람 중 하나가 나였으면. 힘든 일로 답답하면 기분이 풀릴 때까지 얘기하고 싶고, 아니면 침묵하고 가만히 앉아있어도 어색하지 않은 사람이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내가. 내가 건네는 말 한마디가, 카톡 하나가 삭막한 일상에서 힘이 되었으면. 이 생각한지 얼마 안되어 h로부터 한국의 꽃사진을 받았다ㅎㅎㅎ
한글의 '정'이라는 단어가 번역하기 힘든 것처럼 네덜란드어의 '허젤러흐' 단어도 그렇단다. 유유자적하다, 따뜻하다, 부드럽다 등등 서부 사람들은 바빠도 안 바쁜척하느라 은근 힘들다던데, 뉴욕은 바빠바빠 모드가 쿨한 것/미덕으로 여겨지니 차근차근 하려는게 요상하게 여겨진다. 그래서 바르샤에서 카사구르메 언니가 단골 커피집에 아침에 우리를 데려갔을 때 너무 부러웠던 것 같다. 에스프레소 내려주는 할아버지가 오늘 날씨 진짜 좋네~ 오늘은 너 뭐할거니? 이렇게 묻고, 이웃끼리도 담소를 나누며 하루를 시작하는게. 그렇다면 난 뉴욕에서 바르샤같은 삶을 살아야지-
공부 좀 하니까 바로 눈에 다래끼가 났다ㅠㅠ 금요일에 시험인데. 그래도 공부할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 나 주님과 함께 상한 맘을 드리며 주님 앞에 나가리
나의 의로움이 되신 주 그 이름 예수 나의 길이 되신 이름 예수
나의 길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아오리라
오늘 하루 단 한 번이라도 나를 통해 다른 이가 기쁨을 얻도록 하소서.
그리고 잠자리에 들 때 그 기쁨이 내게로 돌아와 내 가슴에 평화의 강으로 흐르게 하소서.
<하루의 기도>중에서
이병률
우리는 점이다
코와 흉터 사이
혹은 입과 가슴 사이
아주 알 수 없는 이야기처럼 뭉쳐져
떡하니 표면에 돋아난 무엇
우리는 점이라서 떠돈다
환상을 본다
가끔가다 시큼털털한 문장을 떠올리고
그것을 외우기 위해 머리를 강요한다
우리는 점이라서 감정이 작다
특히 한 번도 몰아붙인 적 없는 결단 같다
우리는 점이라서 몰려다니지 않는다
점이어서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
닮아갈 수도 없다
우리는 점이어서 바라볼 수 없다
점이어서 달린다
점이어서 분열한다
그러므로 나는 눈으로 내릴 것이고
그러므로 나는 내가 될 때까지
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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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바꾼 방 구조, 좀 많이 마음에 든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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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스윗한 케일리. 내가 챙겨주려고 했는데 오히려 내가 챙김받고, 힘들어하고 있는 1년차 여자애를 위해서 토요일엔 저녁대접을 했다는 얘기를 우연히 듣게 됐다. 카드와 함께 뭔가 한국 까까를 주려고 "프리미엄" 누네띠네를 샀는데 맘에 들어했으면 'o' 칸초 있으면 그거 주려고 했는데 없었음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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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걷고 싶어, 리버사이드 공원에서 mp3 들으면서! 요즘 운동 뭐하냐는 질문을 정말 많은 사람한테 받았는데, 스트레칭 말고는 특별히 못하고 있어요. 왜냐면 읽을 것도 많고, time series 넘 어려워서 진짜 보고 또 봐야되거든. 금요일에 econometrics 마지막 시험!! 난 머리가 좋은게 아니라 노력에 너무나도 정직하게 정비례해서 알기 때문에 시간을 많이많이많이 투자해야함. 레츠 무브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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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누군가에게 뭔가 싫은 소리, 진짜 잘 못한다. 한 번은 누군가 밥을 정말 질게 했는데, 내가 맛있는데 뭘~ 먹을께 있는게 어디야. 감사하네- 이랬더니 세미야.. 이럴땐 잘못한것 얘기해줄 필요도 있어.라는 말을 들었다. 너무 모든 것에 포지티브 리액션으로 반응하는 것도 안 좋은건가. 근데 확실히 굿뉴스와 관련된 건 담대하게 말해야 되는 건데 (에베소서 6:19), 조원들이 다들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믿고, 학업도 워낙 바쁘다보니 너무 푸시하기도 그렇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는 듯. 자꾸 얘기하면 사랑으로 권면하는 건데도 부담 느낄 거 같아서. 근데 진짜 기도하니 이제 모든 조원이 WASH 모임엔 못 와도, 주일 성수한다 고맙습니다 :):)
넘넘 은혜받은 부활주일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들은 유기성 목사님의 "은혜받았다고만족하지마라"는 4/8말씀.
TV가 잘 안 나오면 어떻게 해요? 아, 하나님이 지금 티비 안 나오게 하시나봐요. 이렇게 쉽게 생각해요?
아니죠. 안테나도 돌려보고, 옆에도 쳐보고, 전원도 뺏다 꽂았다, 하고 별 짓 다하죠.
그럼 예수님이 내 마음에 있다는데, 어떻게 반응하나요?
요즘 청년들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 음성을 듣지 못한 것에 대한 답답함이 없어요.
예수님이 정말 내 마음에 계신가? 진짜? 어떻게? 하고 질문이 나와야되는데.
은혜를 받았다면 지금 더 깊게 만나주시려는 타이밍이에요.
내 맘대로 정리한 목사님 말씀. 안그래도 돌판이 아닌 마음판에 새언약을 준비하신다는 예레미야 말씀을 읽은 고난주간이었는데. 이렇게 다시 말씀으로 얘기해주시다니! 매일매일, 더 알아가 보아요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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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고요히 흐른것처럼
눈물을 흘리는 것과 우는 것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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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항상 갈구는 친구들만 있었는데 나랑 있으면 소명을 더 생각하게 되서 너무 좋다고, 아름답다고 얘기해주었다. 내가 오히려 더 많이 느끼고 배우고 있었는데 :p 정말 한 없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다시 새롭게 해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기념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동역자 주셔서 무한 감사드려요.
21세기의 친구들은 문자대신 페탐으로 연락합니다ㅎㅎ 대학교 때 제일 친했던 친구가 대학원을 다시 CU로 올 수도 있다는 소식! 서부에 남는 것도 좋겠지만.. 첫인상이 틀릴 수 있다는 걸 일깨워주고, sust dev에 대한 꿈, 아프리카의 꿈도 함께 꾸고, 사진도 함께 배우고, 에스파냐에서 봄의 추억도 함께 쌓은 친구인데- 복음도 전하고, 다른 전공이지만 아프리카, 한반도를 위한 연구 함께 할 수 있었으면 :D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해 늘 깨어서 모든 일에 인내하며 성도를 위해 간구하십시오. 에베소서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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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감사하고 늘 기뻐하고 언제나 남을 축복하는 사람은… 누구도 불행하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결정적인 소명에 귀기울이면서 산 인생은 다른 모든 청중을 밀어내는 단 하나의 청중(유일한 청중) 앞에서 살아 온 인생이다.
창세기에서 볼 수 있는 아브라함의 소명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여정 동안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사는 것이었다. 보통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먼저 불러내시는데, 한번은 그분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하)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음성 뒤에는 하나님의 눈이 있고 그 눈 뒤에는 얼굴이 있으며 얼굴 뒤에는 마음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 앞에서 사는 것이다. 그것은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사는 것이며, 청중을 의식하는 데서 돌이켜 오직 최후의 청중이요 최고의 청중이신 하나님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행위는 유일한 청중 앞에서 행한 것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유일한 청중의 눈에 띄고 그분의 칭송을 받는 자는 그 이하의 다른 청중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유일한 청중 앞에서 사는 자는 세상을 향해 이와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는 단 하나의 청중밖에 없다. 네 앞에서는 내가 입증해야 할 것도,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
선교를 생각할 때 마다 우리가 갖는 생각은 ‘내가 무엇을 할수 있는가?’라는 사역중심의 생각을 자주합니다. 특별히 PGM의 ‘선교는 바로 지금 여기서부터’(here and now)의 개념을 생각할 때 우리는 내가 가진 은사와 내가 가진 직업과 내가 가진 기술과 모든 전체를 동원하여서 주님의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스 기니스(Os Guinnes: 중국에서 태어난 영국인 옥스퍼드대락 사회학 박사. 유명 변증가 현재 트리니티 포럼 선임연구원)에 의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제 2차적인 부르심이라고 정의됩니다.
오스 기니스에 의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제 1차적인 부르심은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을 위한 부르심’(오스 기니스의 소명. P.53)이라고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사명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일수록, 사역중심(task oriented person)의 사람일수록 주의하여 들어야 할 진리의 말씀입니다. 우리를 부르심은 세상속에 나가 일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을 위한 부르심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않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아가 2:10) 고 자기에게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때에도 함께 가자고 부르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숨어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창 3:9) 부르시면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오스 기니스는 이 일차적인 부르심은 소명(calling)으로 하나님께로 나가는 것이요 세상속에 나가 행하는 모든 소명들(callings)을 행하기 전에 제일 먼저 행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호성기 목사님 칼럼 _ 제 1차적인 부르심
[출처] 오스 기니스 『소명』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②|작성자Lena
미안해요, 사랑해요, 고마워요.
우리가 느끼는 마음을 표현하기엔 역부족이지만, 그래도 전하기엔 충분한 말들.
이찬수 목사님 말씀처럼,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슬프면서도 기쁘고, 기쁘면서도 슬픈 묘한 고난주간이었는데 너무 은혜받은 성금요일-토요일이었다. 돌아오자마자 저녁에 엄마로부터 전화가 와서 나눌 수 있었다.
잘 있다가도 왜 문득 힘든 순간들이 있는지 기도해보니 영이 끊겨진 것 같은 마음 때문이었다고, 근데 예수님은 우리는 상상도 못할 거절감을 느끼셨다고. 우리 한 명 한 명을 위해서. 그러면서 짧은 간증을 하니까, 엄마도 정말 네 말대로 공부적인 면에서는 노력한 것 이상으로 계속 잘 되어왔던 것 같다고 하셨다. 날 만나주시기위한 치밀한 인도하심이었어ㅠㅠ 넘넘 섬세하신거 아님ㅠㅠ 중학교때 미국에서 친구 손 잡고 교회에 처음 나가봤고, 소사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대학와서는 없던 전공까지 학부에 생기고. 그걸로 대학원까지 와서 하나님과 더 교제하게 됐고.
믿지 않는 가정에 있으니까, 진정한 내 편은 가족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나를 만나주시려면 떨어뜨려야 하셨나보다. 고등학교도, 대학도. 또 3살때부터 놀이방에 맡겨지고, 집에 도우미 아주머니가 계시고, 중학교 때는 엄마 학교가 안식년이 1년 이상 되지 않아서 다미를 돌봐야 했고. 부모님 걱정 시키고 싶지 않아서 힘든 일이 있어도 잘 얘기하지 않게 됐고, 사춘기도 없었고, 고등학교도 떨어져서 다니면서 점점 아빠엄마랑 더 친구처럼 되어버린. 좀 더 케어해주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계속 어느 관계에 있어서 확인받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엄마가 미안해 하셨다.
표면적인 얘기는 잘 나누어도, 속마음은 잘 얘기하지 않는 사람으로 큰 것 같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걱정하는게 싫어서 잘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던 듯. 그래서 내가 작년에 공부 너무 힘들어할 때 엄마는 처음에 믿지 못하시지 않았을까. 이런 얘기를 하다보니 눈물이 나게 됐지만, 그렇다고 부모님을 원망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덕분에 여기까지 내가 오게 되었으니. 부모님과 이런 horizontal한 관계인 것도 좋고, 내가 좋아하는 앵무새 죽이기에 나오는 Atticus와 아이들 Jem and Scout 처럼. 근데 난 좀 다르게 살 것 같아. 세상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커리어에 손해가 되더라도 최고의 축복인 아이들에게 더 시간을 쏟을 수 있도록.
나는 상상도 못 할 끊김을 감당하신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항상 중보하고 계시고 있어서 난 너무 기쁘다고. 그런 희생을 허락하신 하나님이어서 너무 다행이라고.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계속 찌름이 있다보면 영이 반응하는 날이 오겠지. 엄마는 내가 어떤 일에 있어서 빨리 해결해버리려는 성격이 아빠를 닮았다고 하셨다. 답답한 걸 못 참는 거 같아. 공부도 계속 해야지 늘고, 인간관계도 그런거지. 정말 오래참음을 단련시키려고 작정하신듯. 이렇게 알게 해주시는 것에 감사하다. 사랑은 불완전한 사람이 함께 성숙해 나가는 것인가보다, 서로의 struggle을 함께 견뎌주고. 처음부터 모든 단추가 맞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새 옷을 사는게 아니라 오래참음으로 지켜봐주는 것.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골로새서 1:11